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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잡일기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는 미모의 귀족부인이었다
2007/09/19 오후 6:01 | 난잡일기

에이다 오거스타 킹, 러브레이스 백작부인(Ada Augusta King, Lady Lovelace. 1815-1851.) 

여러분은 세계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사진을 보고 계시다. 그래, 이 어여쁘고 곱상한 여편네가 공식적으로, officially, undisputedly 전세계가 인정한 세계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시다.


같은 사진인데 close-shot

놀랍게도, 이 아름다운 여성은 서유럽 사상 최고의 문호 중 하나로 알려진 바이런 경의 유일한 법적 legitimate 자식이기도 하다.

여기서 아직 바이런에 대해 얘기를 한번도 안 한것 같은데, 바이런은 당시 마이클 잭슨보다 더 유명한 슈퍼 스타 예술인이었으며, 지금은 문학사를 공부하는데 절대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낭만주의의 챔피언이자 전설이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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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바이런(George Gordon, Lord Byron, 1788-1824)

18-19세기 유럽의 낭만주의 사조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영국 시인. "돈 주앙" "맨프레드"와 같은 걸작을 남긴 바이런은 작품 속에서 우울하지만 열정적이고, 죄책감에 꺾이지 않는 강철 같은 의지의 방랑자를 그림. 초월적인 자의식과 의지를 소유한 이 '바이런 스타일의 영웅'은 이후 괴테, 발자크, 스탕달, 푸쉬킨, 도스토예프스키, 멜빌, 들라크르와, 베토벤, 베를리오즈 등 수많은 서구 예술가들에게 직접적인 영감을 줌.

바이런은 발이 안으로 굽은 기형으로 태어나 평생을 절름발이로 지내야 했음. 이런 장애에도 불구하고 바이런은 수영, 복싱, 펜싱, 승마 등 모든 종류의 스포츠의 섭렵했으며, 성적으로도 매우 조숙했음.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 작가였으며, 보기 드물게 잘 생긴 외모를 가진 바이런은 주변에 여자가 끊이질 않았으며, 이로 인한 추문 또한 끊이질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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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말이여, 당시 영국에 썬데이 서울에 필적할만한 찌라시가 없어서 그렇지, 요즘으로 치면 데이빗 벡ㅋ햄이 귀족 아가씨랑 야반도주 해서 그 사이에 딸 하나가 생겼다... 거의 뭐 이런 소재였다.

에이다의 어머니는 바이런과 합법적인 혼인 관계를 맺은 유일한 여성이었으나 바이런과의 결혼은 그녀에게 금전적 정신적 고통만 안겨준 채 1년 만에 끝나버렸다. (그러고 보면 빅토리아 벡ㅋ햄은 인내심이 많은 여자라고나 할까.)

에이다의 어머니도 한가락 하던 집안 소공녀였으며, 특이하게도 수학에 조예가 매우 깊으셨다고.


에이다 어머니. 남편 잘못 만나 무지 고생하심.
그리고 남편을 닮은 딸 때문에 또다시 한평생 고생.


대문호였던 아버지와 수학에 조예깊던 어머니의 지적 혈통을 물려받은 에이다.

어릴 때부터 모든 학문에 천재적 재능을 발휘, 주변으로부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천재 소녀로 유명했단다. 그녀를 가르치던 가정교사가 10대 초반에 '더 이상 가르칠게 없수다'라고 했을 정도.
 
에이다가 역사에 남을 천재이자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가 된건 지난 시간에 소개한 불세출의 발명가 찰스 배비지 덕분이었다.

찰스 배비지 얘기 보러 가기

그렇다. 그 저주받은 천재와 에이다는 '사제' 관계였던 것이였던 것이었다. 참 드라마 같은 얘기인데 말여 어째 여태 영화로 안만들어졌는지 원.

얘기가 참 드라마 같은 게, 그때까지 너도나도 죄다 개무시하던 배비지의 "미분기"를 본 에이다. 이 기계야 말로 미래를 뒤바꿀 IT 신기술임으로 눈치 깐다.

이후 에이다는 배비지와 연락을 주고 받으며 미분기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배비지는 에이다의 수학적 통찰력에 탄복,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고 한다.

"이 여성은 내가 발명한 기계에 대해 오히려 나보다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 기계를 설명하는데 있어 이 여성은 나보다 몇 배는 더 탁월했다."  

당시 배비지의 발명품의 가능성을 이해했던 유일한 사람은 에이다. 그녀는 평생 배비지의 후원자를 자처하며, 그의 발명품을 세상을 알리고, 개발 자금을 모으며, 동시에 직접 개발에 관여했다. 이게 그녀 나이 방년 18세의 일이었다.

혹시라도 착각하시지 말라는 뜻에서 에이다의 남편 사진 첨부. 에이다는 19살에 킹 러브레이스 백작(Lord King, Baron of Lovelace)과 결혼해 "에이다 오거스타 킹, 러브레이스 백작부인(Ada Augusta King, Lady Lovelace)"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가끔 에이다와 배비지와의 로맨스를 들먹이는 문서가 있는데 모두 근거 없는 얘기다. 에이다의 남편 역시 수학에 조예가 깊었고, 에이다에게 헌신적인 착한 남편이었다. 
 

IT 역사상 최고의 천재 여성

에이다의 계산기(당시엔 계산기였지만, 지금은 컴퓨터)에 대한 애착은 결실을 맺는다.

에이다는 1842년 오늘날 컴퓨터의 원형이 된 "해석기관"에 관한 책, "배비지의 해석기관에 대한 분석(Observations on Mr. Babbage's Analytical Engine)"을 출간한다.

원래 이 책은 배비지가 투자자를 모집하러 프랑스 가서 컴퓨터(해석기관)의 수익성에 대해 일장 연설 늘어 놓은 걸 프랑스 인들이 '집대성'한 거였다. 에이다는 이걸 다시 구해 와서 영어로 번역했는데, 단순히 번역을 한게 아니라, 아예 책을 다시 썼다.

그리고, 이 책이야 말로 현대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프로그래밍의 기원이 된다.

에이다, 이 상상을 초월하는 (당시 20대) 아가씨는 이 책에서 해석기관에 대한 설명, 해석기관이 완성돼야 하는 이유, 그리고 해석기관이 보여 줄 수 있는 여러 놀라운 기능에 대해 정확하게 기술. 특히, 100년이나 앞서 현대 프로그래밍의 기초적인 개념을 모두 만들어 냈다.
 
이때 에이다는,

- 서브루틴(subroutine)
- 루프(loop)
- 점프(jump)

같은 프로그래밍 트릭들 뿐 아니라,

"if - then" 구문까지 고안함.

프로그래밍에서 "If" 구문은 무지막지하게 중요한데, 이 구문을 발명으로 기계가 단순히 계산만 하는 것을 뛰어 넘어, 주어진 조건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논리"를 수행하게 됐기 때문이다.
 
더더더 놀라운 건, 에이다가 이 IF 구분을 연구하다가 인공지능의 가능성까지 언급했다는 점이다.

다음은 "배비지의 해석기관에 대한 분석"에 실린 글의 일부.

"해석기관은 단순한 '계산 기계'와 같은 영역을 차지하는 발명품이 아니다. 해석기관은 지금껏 개발된 적이 없는 독창적인 것으로, 상징 체계들을 확장하고 활용해 계산 과정과 가장 추상적인 수학 논리 과정을 서로 연결할 수 있다… 해석기관의 이런 기능들로 인해 우리는 생각하는, 혹은 사고하는 기계의 실질적 가능성에까지 접근할 수 있을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에이다는 앞으로 기술이 발전하면 해석기관과 같은 기계가 과학발전을 촉진할 뿐 아니라, 음악을 작곡하고, 그래픽을 만드는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될 것이라 예견하기도 했다.

생각해 봐라. 아직 컴퓨터는 커녕, 전기는 커녕, 석유 정제도 못하던 시절에, 20대 소녀가, 인공 지능을 주창했단다. 근데 얼굴도 이쁘고 집도 부자였단다. 내참.

시대를 100년이나 앞선 에이다의 경이적인 통찰은 앨런 튜링에 의해서 재발견됐고, 그는 그의 "컴퓨팅 기계와 지능(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 논문에서 에이다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천재의 몰락

언제부터인지, 왜 그랬는지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에이다는 극심한 도박 중독증에 시달리고 있었단다.

해석기관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대기 위해 그랬다는 설도 있고, 도박 게임이 제공하는 지적 유흥과 수학적 도전성 때문에 그랬다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에이다의 도박벽은 굉장히 심각한 중독증이었다.

에이다는 나중엔 남편 집안의 패물을 훔쳐 도박 자금을 마련하는 막장 패가망신 테크 트리까지 탔다.

문제는 배비지 요놈도 역시 에이다의 도박 행각에 깊이 관련돼 있었다는 점. 배비지와 에이다는 심지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분기를 개량해 경마에서 우열 평균조건을 계산하기 위한 기능을 만들려 했다. (그러나, 우열 평균조건을 계산하기 위한 컴퓨터 프로그램은 그 후 120년 뒤에나 개발됨.)

남편의 패물까지 저당 잡히고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리던 에이다는 친정 집으로부터 돈을 빌려야 할 절박한 상황까지 몰린다. (에이다는 원래 엄마랑 사이가 좋질 않았고, 결혼 뒤엔 남처럼 지냈다고 한다.)

도박으로 인한 경제적, 정신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에이다는 설상가상으로 자궁암까지 걸려 결국 3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자궁암에 걸렸을 당시의 에이다.
이 뒤로 오래 살지 못했다.


에이다의 어머니가 그린 에이다의 마지막 모습.


에이다의 이른 죽음으로 더 비참해진건 배비지였다. 유일한 후원자이자 지적 동료를 잃은 그는 지긋지긋한 생을 살다 죽는다. 에이다가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컴퓨팅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테지. 어쩌면 스티브 잡스도 빌 게이츠도 나오지 않았을지도 몰라.


에이다를 기리며

에이다의 업적은 그로부터 100년 뒤, 1950년대가 되서야 세상에 알려진다.

이후 에이다에겐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라는 호칭과 함께, 1979년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ADA' 프로그래밍 언어가 탄생한다.

(미국 국방부에서 개발된 'ADA'는 두개 이상의 처리과정을 조율하거나 동일화 할 수 있는 "랑데부 매커니즘--rendezvous mechanism"과 같은 혁신적인 기능들을 선보인 현대적인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

Posted by shun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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